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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의 반란

키프로스의 반란

이오니아 반란 중 다리우스에 맞선 키프로스 왕국들의 봉기, 기원전 498-497년

게임에서: 레벨 7: 불타는 사르디스

기원전 498년 사르디스가 불타자 키프로스의 도시 왕국 거의 전부가 살라미스의 오네실로스를 지도자로 삼아 이오니아 반란에 가담했다. 페르시아군은 킬리키아에서 페니키아 함대와 함께 바다를 건너와 살라미스 부근 지상전에서 승리한 뒤, 반란을 일으킨 도시들을 하나씩 함락했다. 헤로도토스는 이 섬이 자유를 누린 기간이 단 1년이었다고 전한다. 키프로스를 잃은 일은 동쪽에서 이오니아 쪽의 입지를 약화시켰을 것이다.

게임에서: 연대기는 키프로스가 반란에 가담했다가 킬리키아에서 온 페르시아군에 1년 안에 되찾겼다고 기록하며, 시기는 기원전 497년으로 잡았다. 이는 헤로도토스와 일치하지만, 섬이 봉기한 것은 기원전 498년이고 일부 공성전은 주력 전투 뒤에도 이어졌다.

키프로스의 반란: 오네실로스, 살라미스를 장악하다

오네실로스, 살라미스를 장악하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살라미스의 고르고스 왕의 동생 오네실로스는 오래전부터 페르시아인에 맞선 반란을 촉구했다. 고르고스가 거절하자 오네실로스는 그를 도시 밖으로 내쫓았고, 고르고스는 페르시아 편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오네실로스가 포위한 아마토스를 제외한 키프로스의 모든 왕국이 반란에 가담했다.

Herodotus 5.104

키프로스의 반란: 육상과 해상의 전투

육상과 해상의 전투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인 아르티비오스가 킬리키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건너왔고, 그동안 페니키아 함선들이 섬을 돌아 항해했으며, 이오니아 함대가 반란군을 도우러 왔다. 이오니아인은 바다에서 승리했지만, 살라미스 인근의 육전에서는 쿠리온의 스테세노르가 페르시아 편으로 넘어갔고 살라미스의 전차대도 뒤따랐다. 오네실로스는 전사했고 솔로이의 왕 아리스토키프로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티비오스 또한 그 전투에서 죽었다.

Herodotus 5.108-113

키프로스의 반란: 도시들의 공성

도시들의 공성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살라미스인들은 자기 도시를 고르고스에게 돌려주었고, 키프로스의 다른 도시들은 포위당했다. 오네실로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오니아 함대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솔로이가 가장 오래 버티다가 다섯째 달에 페르시아인들이 성벽 밑을 파고들자 함락되었다. 헤로도토스는 키프로스인들이 다시 대왕의 지배 아래 들어오기 전까지 1년 동안 자유로웠다고 말하며 이야기를 맺는다.

Herodotus 5.115-116

키프로스의 반란: 옛 파포스의 공성 둔덕

옛 파포스의 공성 둔덕

당대 기록

옛 파포스 터인 쿠클리아를 발굴하자 북동쪽 성문 가까이의 도시 성벽에 기대어 쌓은 거대한 공성 경사로가 드러났다. 그 흙더미 속에서는 부서진 조각상과 봉헌물이 나왔고, 주변에서는 수백 개의 화살촉과 다른 무기들이 발견되었다. 수비대는 경사로를 무너뜨리려고 그 아래로 땅굴을 팠다. 발굴자들은 이 공격을 기원전 497년경 페르시아의 재정복 시기로 보며, 이는 헤로도토스가 막연하게만 언급한 공성전의 물적 증거가 된다.

F. G. Maier and V. Karageorghis, Paphos: History and Archaeology, 1984

키프로스의 반란: 오네실로스의 머리

오네실로스의 머리

후대의 전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마토스 사람들은 오네실로스의 머리를 베어 성문 위에 걸어 두었다. 벌들이 속이 빈 두개골을 벌집으로 채우자, 신탁은 머리를 묻고 오네실로스를 영웅으로 삼아 해마다 제물을 바치라고 일렀다. 이 이야기는 지역 제의의 기원을 설명하며, 기록이라기보다 경이로운 설화로 꾸며져 있다.

Herodotus 5.114

출처

  • Herodotus 5.104-116
  • F. G. Maier and V. Karageorghis, Paphos: History and Archaeology, 1984
  • P. Briant, From Cyrus to Alexander,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