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도니오스는 최고위 페르시아 귀족으로, 다리우스와 함께 거사한 고브리아스의 아들이자 다리우스의 딸 가운데 한 명의 남편이었다. 그는 기원전 492년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원정을 이끌었고, 크세르크세스에게 그리스 침공을 권했으며, 살라미스 이후 남겨진 군대를 지휘했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에서 그의 군대가 패하고 그 자신도 전사하면서,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려던 대왕의 시도는 막을 내렸다.
게임에서: 게임의 연대기 주석은 마르도니오스를 한 줄로 요약한다. 고브리아스의 아들이자 다리우스의 사위로, 기원전 492년 아토스 앞바다에서 함대를 잃었고, 크세르크세스에게 전쟁을 부추겼으며, 살라미스 이후에도 그리스에 남았다가 플라타이아에서 전사했다.

왕좌에 가까운 가문
당대 기록다리우스의 베히스툰 비문은 마르두니야의 아들 가우바루바를 기원전 522년 가우마타에 맞서 그의 편에 선 여섯 페르시아인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가우바루바는 그리스인이 말하는 고브리아스이며, 마르두니야는 마르도니오스의 고대 페르시아어 형태다. 따라서 이 장군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을 것이며, 다리우스를 왕좌에 올리는 데 힘을 보탠 가문 출신이었다.
DB §68

기원전 492년의 원정
고대의 전승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젊은 나이에 다리우스의 딸 아르토조스트라와 막 혼인한 마르도니오스는 이오니아로 와서 그리스 참주들을 몰아내고 민주정을 허락했다. 그의 함대는 싸움 없이 타소스를 손에 넣었고, 그의 군대는 마케도니아인을 대왕의 신민으로 삼았다. 다만 마케도니아는 이미 여러 해 전에 흙과 물을 바친 바 있었다. 아토스 산 앞바다에서 폭풍이 함대를 덮쳐, 헤로도토스의 셈으로는 함선 300척과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고, 마르도니오스 자신도 트라키아의 브리고이족이 감행한 야습에서 부상을 입었다.
Herodotus 6.43-45

주전론자이자 그리스 원정군 사령관
고대의 전승헤로도토스는 마르도니오스를, 아르타바노스의 신중론에 맞서 크세르크세스에게 아테네를 응징하라고 부추긴 으뜸 신하로 그린다. 살라미스 이후 그는 대왕이 귀국하는 동안 정예 병력과 함께 남겠다고 자청했다. 그는 테살리아에서 겨울을 나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를 보내 아테네에 동맹을 제안했고, 기원전 479년 아테네를 다시 점령해 불태운 뒤 보이오티아로 물러났다.
Herodotus 7.5-10; Herodotus 8.100-102; Herodotus 8.113; Herodotus 8.136-140; Herodotus 9.1-13

플라타이아에서의 죽음
고대의 전승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마르도니오스는 정예 페르시아인 1000명 사이에서 백마를 타고 싸웠으며, 아림네스토스라는 스파르타인이 그를 죽이자 페르시아인들이 무너졌다고 한다. 이튿날 그의 시신은 사라졌고, 헤로도토스는 누가 시신을 묻었는지를 두고 서로 엇갈리는 여러 주장을 전해 들었다. 그는 또한 파우사니아스가 레오니다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시신을 훼손하자는 권유를 물리쳤다고 전한다.
Herodotus 9.63-64; Herodotus 9.78-79; Herodotus 9.84

무모한 총신인가, 유능한 장군인가
분쟁 중헤로도토스는 마르도니오스를 야심만만하고 그리스를 다스리고 싶어 안달하는 인물로 그린다. 이에 대해 현대 역사가들은 기원전 492년의 원정이 폭풍에도 불구하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확보했으며, 침공은 한 신하의 계략이 아니라 왕실의 정책이었다고 반박한다. 헤로도토스는 플라타이아에서 그가 거느린 병력을 30만으로 적지만, 역사가들은 이 숫자를 크게 과장된 것으로 본다.
P. Briant, From Cyrus to Alexander, 2002; J. F. Lazenby, The Defence of Greece 490-479 BC, 1993; Herodotus 9.32
출처
- Herodotus, Histories, books 6-9
- DB §68
- P. Briant, From Cyrus to Alexander, 2002
- J. F. Lazenby, The Defence of Greece 490-479 BC, 1993